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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6. 17:28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지적(知的)2013. 8. 6. 17:28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지금까지, 유사 이래 수많은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민주주의가 세계 전 지역에 뿌리내리고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영구적인 권력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비틀어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영구적인 절대 권력'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찾아보기 가장 쉬운 절대권력의 예는(영구성은 보장할 수 없지만) 북한이다. 2013년 8월 현재 3대째 권력을 세습해 왔음에도 사회는 무척 안정적이며, 심지어 100%에 가까운 투표율과 100%에 가까운 지지율로 국민들에게 그 권력을 인정받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건 실패작이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 사회를 세계의 다른 부분과 철저히 격리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세계 속의 유일한 고립국이 된 북한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이 극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동안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경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전쟁 직후에 비슷한 수준이던 대한민국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국민의 대다수가 '굶어죽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게 된 것과 비교해보면 이 '고립'이 북한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로 북한의 주민들이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필연적이고, 이미 어느 정도는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여기에 북한이 겪고 있는 극심한 식량난이 지속되고 어느 정도 부각된다면 북한의 '김씨 정권'이 무너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방법으로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다.


  현대에 들어서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기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잡고 있고, 그에 반하는 제도와 개념을 배척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 흐름에 반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감히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분야당 두세 명씩, 사회의 전 분야에 걸쳐 해당 분야에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엘리트를 두세 명씩 포섭한 다음 '혁신'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정치에 도전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거의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기 때문에 각 분야 최고의 사람들이 내놓는 플랜들, 즉 당신의 '공략'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당신을 정계에 진출하게 해 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간단하다.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점점 더 높은 자리(최종적으로는 대통령)를 노리는 것이다. 당신 참모진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당신은 간단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그러면서 정부 구조를 통제하기 편한 방식으로 개편하고, 더 나은 정치를 약속하며 입법부의 권한을 축소시키며 행정부에게 힘을 실어준다. 가능한 한 빨리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연임이 가능토록 하고 믿을 수 있는 후계자를 세우면 영구적인 권력을 위한 대략적인 과정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간다면, 국민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의 존재는 언제나 필요하므로, 당신의 정권과 국민들에게 동시에 충성을 다 할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것은 당신이 구축한 새로운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당신은 '영구적인 절대 권력'을 얻었다. 당신이 구성한 참모진의 힘이 필요한 당신의 후계자는 절대로 당신을 배신할 수 없고, 당신이 창출해낸 정권은 국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는다. 내부로부터의 분열만 통제할 수 있다면, 당신의 정당은 영원히 대한민국을 지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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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8. 5. 18:13

최소한의 존엄성 지적(知的)2013. 8. 5. 18:13

최소한의 존엄성



  흔히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존엄'이란 뭘까? 무엇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한다. 그러면 인간답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동물과 인간을 구분지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즉 '이성'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다움'이라 생각한다. 정리해보면 '인간의 존엄'은 '이성을 가질 수 있는 것', 조금 뭉뚱그려 표현하면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받는 것'쯤 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왜 지켜져야만 하는 걸까? 인간이 반드시 이성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모든 인간이? 어느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온전한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이성이 키워내는 '생각'의 힘은 무척 강력하고, 그 '생각'에서 나온 현대 문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성으로써 간단히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다는 말은, 모두가 이성으로 사고할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추해 보건대, 인간은 자신이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대비하려는 듯 하다. 지금은 이성을 가지고 자유로이 사고하지만 더 강력한 존재에 속박당해 그것을 잃을 가능성이 상존한다면, 모든 인간에게 그럴(이성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할까? 이성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떤 비용도 들지 않으므로 이성을 통한 사고의 양에 상한선을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두려고 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인간이 생각하는 양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 '하한선'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통제한다면?


  인간이 '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 요건이 만족되었을 때다. 예를 들어 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그리고 최소한의 휴식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계속 일만 해야 한다면 인간답게 이성으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힘들 것이다. 또,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예컨대 감옥에 갇힌) 경우에도 이성적 사고가 힘들어질 것이다. 즉, 우리가 '인권'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권리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을 때에만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신체적 자유, 그리고 여가 시간.


  신체적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다. 그런데 여가 시간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일하지 않는 시간이 곧 여가 시간이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에 노동 시간의 한계를 두고, 최저임금제를 통해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함으로써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있다. 결국 '존엄성'이 보장되는 정도는 노동 시간의 한계를 정하는 '근로기준법'과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는 '최저임금제'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의 존엄성'의 정도를 시간당 최저임금을 주당 노동 한계시간으로 나누는 방법으로 수치화할 수 있겠다. 거기에 물가 변동 수준을 반영한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존엄성의 보장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각 국가별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적 자유의 수준을 반영한다면 국가별로 존엄성을 보장하는 정도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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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7. 31. 21:12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지적(知的)2013. 7. 31. 21:12

  왜 사는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생에서 계획하고 있는 여러가지 단,장기적인 목표들을 나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적어도 나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죽기 싫으니까'. 내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사는 건 아니지만, 이 세상이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된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인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살 시도 역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심한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경우에 인간은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데, 내 생각에 그런 충동은 지속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견딜 수 없게 된 뇌가 다른 신체 부위의 손상을 초래함으로써 주의를 돌려보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나타나는 것 같다. 즉, 충동의 이유는 자해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왜 '적당한 수준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걸까? 아마도 그건 모든 것을 과장해서 생각하기 쉬운 동물 뇌의 특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는 뇌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이성'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멋대로 판단해서 그 생각이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해 후에는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메커니즘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해가 권장되는 건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효과를 믿지 않지만 의사의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며, 근원적인 스트레스를 제거해야 어느 정도 자해-자살 충동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단지 '죽기 싫어서' 사는 걸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틀린 답은 아니다. 하지만 그 표현을 단순히 '죽음이 싫다'고만 해석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가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많이 찾는 편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나 푸르른 자연, 태연스럽게 활보하는 귀여운(!) 야생 고양이들, 저녁때면 친구들에게 거는 '수다용' 전화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즐거움들을 누리고 있는데 이 즐거움들을 누리기 위해 산다고 해도 나쁘지 않은 답이 될 것 같다. 내 진로와 전공은 일단 생계, 즉 삶을 위한 것이니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데 살아가다 보면 일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런 현상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슬플 거라고 생각한다. 왠지 '나는 살기 위해 일하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라는 말을 평생 달고 다닌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결론? 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산다. 끝!

 

2013.07.3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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