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

« 2024/5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0

  1. 2016.03.20 냥이 (160319)
  2. 2014.04.30 감정의 모래성, 취중진담
  3. 2014.04.30 시작, 그리고 나머지 절반
  4. 2014.04.30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5. 2013.08.09 체험의 전달
  6. 2013.08.07 마인드 컨트롤 1
  7. 2013.08.06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8. 2013.08.05 최소한의 존엄성
  9. 2013.07.31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10. 2013.07.31
2016. 3. 20. 21:13

냥이 (160319) 카테고리 없음2016. 3. 20. 21:13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4. 4. 30. 15:02

감정의 모래성, 취중진담 카테고리 없음2014. 4. 30. 15:02

감정의 모래성취중진담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다취했을 때 오히려 진심을 담은 말을 건넨다는 뜻인데…….

 

  경험자 입장에서는 솔직히 좀 아니라고 본다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처럼술을 마셔 취한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지고 사리 분간이 잘 안 되는 법감각은 무뎌지고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는 상태에서 하는 사람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물론 감정이 강해지면서 본심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거기에 속으면 안 된다특히 사랑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평소에 제정신일 때는 입도 떼지 못하다가 술이 들어가면 갑자기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건 뭐란 말인가술로 용기를 얻었다고 좋게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이성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는(=취한상태에서 감정이 나서서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떻게 되었든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진심이 그렇다면 기꺼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나는 왜 이성이 허락하지 않았을까라고 되묻고 싶어진다진짜 사랑하는데 경제나 기타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했을 수도 있고심지어는 평소에는 아무 느낌 없다가 술이 들어가서 폭발한 감정이 잘못된 대상을 선택한재수 없는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취중진담이 진심이라 믿고 싶어지는가그렇다면 지금 이 글의 구성을 보면 된다논리는 언제 쓰러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동력이 다 떨어진 기계와도 같고글을 쓰는 자의 태도도 굉장히 불성실하다게다가 이 글은 적어도 A4용지 한 장 분량은 채우던 관습을 깨고 이 문단에서 끝날 것이다그래도 취한 자를 믿고 싶어지는가그렇다면 마음대로 하시길다만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길.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4. 4. 30. 15:02

시작, 그리고 나머지 절반 지적(知的)2014. 4. 30. 15:02

시작, 그리고 나머지 절반

 

  ‘시작이 반’이라는 말, 일견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어떤 일을 시작해보면 왜 다들 그렇게 말하는지 알게 된다. 어떤 프로젝트를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하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백날 일기를 쓴다는 생각만 하고 실제로 펜을 들거나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거나 하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일기를 쓴다는 ‘생각’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그런 일들이 많은 것 같다. 목표로 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는 것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예로는 새해가 밝아올 때마다 설정하는, 그러나 제대로 실천되는 법은 절대로 없는 상상 속의 목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단순히 목표로 삼기만 하고 실천을 시도해보지도 않는 일이 얼마나 될까? 새해 목표를 세워놓고 정말로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기는 할까?

 

  보통 새해 목표로 금연, 다이어트 등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며칠 동안 해당 목표들을 유지하며 ‘올해야말로’라는 말을 통해 전의를 불태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많은 사람들이 애초의 목표를 하향조정하거나 폐기처분하게 된다. 그러면 그 한 해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인생 속의 평범한 1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즉 ‘시작이 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목표를 유지하며 달성하게 만드는 ‘실천’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천’의 동력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목표의 달성가능 여부’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도가 시작될 때 꿈에 부풀어서 실현 가능 여부조차 불확실한 목표를 내걸게 되면 그 순간에는 그런 목표를 설정한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로 첫 발을 내딛게 되면 그 목표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때부터는 뻔하다.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애써 합리화하며 해당 목표를 포기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 밖에 더 될까?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검토해보면, ‘시작이 반’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힘차게 첫 발을 내딛기 전에, 목표의 실현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현 상황에서 지극히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한 목표의 설정이 전제된다면 막상 그것을 향해 첫 발을 내디뎠을 때 힘이 들고 부담을 느끼게 되더라도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실현가능한 목표이므로 마인드 컨트롤이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했을 때 보다는)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이다.

 

  ‘실현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한 움직임을 ‘시작’할 수 있다면,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그 목표는 달성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현가능한 목표를 설정했는데도 그것이 너무 커 보인다면, 그것을 기간별로 잘게 쪼개서 하루하루 그 날의 할당량을 실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0) 2014.04.30
체험의 전달  (0) 2013.08.09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4. 4. 30. 15:02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지적(知的)2014. 4. 30. 15:02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늦은 밤, 혼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 죽음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곤 한다. 막 십대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오던 인류의 고질적인 고민거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는 것이, 죽음 이후에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

 

  일단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오면, 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시도부터 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로서의 생각이 멈춘다고 해도 내가 속해 있는 ‘인간’이라는 종은 존속할 것이며, 나의 후손을 통해서 나의 분신이 이 땅에 계속 살아남아 나를 대신해줄 것이라는 식의 위안. 하지만 아무리 나의 분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내가 소멸하고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다음에는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것은 생물로서의 자연스러운 ‘끝’이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한다. 모두가 예외 없이 맞는 결말이라고 그것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것은 꼭 ‘우리 모두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될 테니 나의 비극 역시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쉬운 예를 들자면 마지막으로 남은 인류의 후손이 모두 한 대의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데, 그것이 추락하고 있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공포가 점점 더 커져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나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현실 도피’이다. 머리맡에 놓여 전기를 공급받고 있던 나의 SHW-E250L.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와이파이 신호를 통해 ‘죽음’이라는 주제를 뇌리에서 몰아내고 그보다 좀 더 ‘현재에 가까운’ 현실적인 삶의 주제들을 생각하려는 것이다. 즉 ‘현실로 돌아감’으로써 ‘현실 도피’를 시도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철저히 세속적인’ 생각들을 불러옴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정신의 파괴를 막을 수 있지만, 이 방법은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애초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 때마다 바로 세속적인 문제에 집중하면 공포를 쉽게 몰아낼 수 있음에도 그 주제에 맞서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보는 것은, 뭔가 더욱 근본적이면서 확실한 해결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의 대상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항상 다른 영역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 벗어나기만 한다면, 결국 해당 주제는 극복되지 못한 채 언제든지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약점’으로 남게 된다. 그걸 알고 있지만, ‘죽음’은 2014년의 봄을 살아가고 있는 20대 초중반의 나로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Terra Incognita'로 남아 있다.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작, 그리고 나머지 절반  (0) 2014.04.30
체험의 전달  (0) 2013.08.09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8. 9. 21:28

체험의 전달 지적(知的)2013. 8. 9. 21:28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체험'을 한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향을)맡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더라도 여러 사람이 완전히 같은 체험을 하고 동일한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만 생각이나 감각의 '기억'이 다르다면 같은 곳에서 같은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른 것을 느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도 대개의 경우, 인간들은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갖고, 이에 크게 벗어난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떠한 상황을 체험한 인간이 자신의 느낌을 다른 인간(들)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경우이다. 사람들은 글, 그림, 사진, 말, 행동, 소리 등의 의사 전달 매체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으로부터 도출된 자신의 '느낌'을 전하고자 한다.


  가장 흔한 예로, 멋진 자연의 풍경을 보고 감탄하며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가 후에 지인들에게 보여주는 촬영자의 경우가 있겠다. 촬영자가 해당 문화권의 보편적인 감각의 소유자라면 그(또는 그녀)의 지인들은 사진을 보고 감탄할 것이다. 여기서 '공감'이 발생한다. 하지만 촬영자의 지인들은 렌즈를 통과한 '이미지'를 접한 것일 뿐, 촬영자와 동일한 체험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고화질로 촬영했다고 해도 한 쪽에 1억 화소 정도 된다는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 보다는 영상의 절대적인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촬영자가 사진을 찍으며 느꼈을 산들바람이나 그의 주변에서 지저귀었을 새의 소리 그리고 그의 코를 간질였을 아득한 풀의 향기 등은 촬영자의 지인들이 사진을 본다고 해서 알(느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생활관의 내 침대에 엎드려서 PMP로 Buono!의 '夏の星空'을 들으며 묘한 행복감에 젖어 이 글을 쓰는 이 '체험', 그리고 이 체험으로부터 받는(그러니까 내가 가지는) 느낌은 결코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기술의 진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그 '체험' 자체를 기록하여 전달받는 사람이 해당 '체험'의 '감각'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나의 행복감을 수신자가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맡는 것을 그대로 그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맡을' 수 있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체험의 전달'이 훨씬 쉽고 정교해질 것이다. 어서 '감각 레코더(recorder)'가 발명되길 고대해본다.


2013.08.09 (금), 20:46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작, 그리고 나머지 절반  (0) 2014.04.30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0) 2014.04.30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8. 7. 17:42

마인드 컨트롤 지적(知的)2013. 8. 7. 17:42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시점이 있기 마련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을 위해 소소한 것들을 포기하거나 극복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을 맞이할 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자 할 때에도 마인드 컨트롤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이유,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방법, 그리고 마인드 컨트롤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마인드 컨트롤은 왜 필요한걸까? 마인드 컨트롤은 일종의 자기 기만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스스로를 밀어넣으려 할 때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자기 강요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며 살 수는 없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입시 준비에 쏟아야 할 때도 있고, 2년의 청춘을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할 때도 있으며, 악마와도 같은 상사 앞에서 적의(때로는 살의)를 감추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에서 마인드 컨트롤은 인간이 상황을 (조금은)견딜 만하게 만들어 주며,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앞의 세 경우에서 나약한 인간이 자살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거나 군생활을 견디거나 상사를 불쾌하게 하지 않도록 하게 해 주는 것이 곧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인드 컨트롤은 어떻게 하는 걸까? 간단하다.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 뒤에 곧 따라올 달콤한 열매가 있음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하면 된다. 입시 준비생에게는 대학 입학, 군인에게는 전역, 불쌍한(악마 상사를 둔) 직장인에게는 봉급이 바로 그 '달콤한 열매'가 될 것이다. 만약 견뎌내야 할 상황 뒤에 따라올 달콤한 열매가 없다면 자신을 그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성공적인 마인드 컨트롤'의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몸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당장 그럴 수 없다면, 그럴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린다. 감정 상태는 절대적으로 육체 상태의 영향을 받으므로,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상황을 극복해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 즉 달콤한 열매에 정신을 집중한다. 자신이 달콤한 열매를 얻었다고 상상하고 따라오는 기쁨을 마음껏 누린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까지 기쁨을 부풀린 후에 이제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 즉 극복해야 할 상황에 대해 생각한다. 이 때 추상적으로 대충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한 상세히 떠올린다. 생각만으로 쉽지 않다면 적어보는 것도 좋다. 충분히 생각했다면, 다시 '열매'를 떠올린다. 상상의 양팔저울의 한 쪽에는 극복해야 할 상황을, 그 반대편에는 달콤한 열매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저울이 열매 쪽으로 기우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상황 속에서 힘들 때마다 열매의 기쁨과 열매 쪽으로 기운 저울을 생각하며 화이팅을 외치면 된다.


  그러면 마인드 컨트롤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큰 것은 역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이유이기도 한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적어도 견디게 하는) 힘'이다. 어려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극복하게 하는 이 힘은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원하는 대로 조절하는 능력이나 원하는 것을 위해 즐거움을 포기할 줄 아는 마음가짐 등, 살면서 꽤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0) 2014.04.30
체험의 전달  (0) 2013.08.09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0) 2013.07.31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8. 6. 17:28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지적(知的)2013. 8. 6. 17:28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지금까지, 유사 이래 수많은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민주주의가 세계 전 지역에 뿌리내리고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영구적인 권력은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비틀어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영구적인 절대 권력'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찾아보기 가장 쉬운 절대권력의 예는(영구성은 보장할 수 없지만) 북한이다. 2013년 8월 현재 3대째 권력을 세습해 왔음에도 사회는 무척 안정적이며, 심지어 100%에 가까운 투표율과 100%에 가까운 지지율로 국민들에게 그 권력을 인정받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건 실패작이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 사회를 세계의 다른 부분과 철저히 격리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세계 속의 유일한 고립국이 된 북한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이 극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 동안 국민의 대부분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경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전쟁 직후에 비슷한 수준이던 대한민국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국민의 대다수가 '굶어죽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게 된 것과 비교해보면 이 '고립'이 북한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로 북한의 주민들이 나머지 세계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필연적이고, 이미 어느 정도는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여기에 북한이 겪고 있는 극심한 식량난이 지속되고 어느 정도 부각된다면 북한의 '김씨 정권'이 무너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방법으로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다.


  현대에 들어서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기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잡고 있고, 그에 반하는 제도와 개념을 배척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 흐름에 반할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감히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분야당 두세 명씩, 사회의 전 분야에 걸쳐 해당 분야에서 최고로 일컬어지는 엘리트를 두세 명씩 포섭한 다음 '혁신'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정치에 도전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거의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기 때문에 각 분야 최고의 사람들이 내놓는 플랜들, 즉 당신의 '공략'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당신을 정계에 진출하게 해 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간단하다.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점점 더 높은 자리(최종적으로는 대통령)를 노리는 것이다. 당신 참모진의 눈부신 성과에 힘입어, 당신은 간단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그러면서 정부 구조를 통제하기 편한 방식으로 개편하고, 더 나은 정치를 약속하며 입법부의 권한을 축소시키며 행정부에게 힘을 실어준다. 가능한 한 빨리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연임이 가능토록 하고 믿을 수 있는 후계자를 세우면 영구적인 권력을 위한 대략적인 과정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간다면, 국민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의 존재는 언제나 필요하므로, 당신의 정권과 국민들에게 동시에 충성을 다 할 엘리트들을 양성하는 것은 당신이 구축한 새로운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니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당신은 '영구적인 절대 권력'을 얻었다. 당신이 구성한 참모진의 힘이 필요한 당신의 후계자는 절대로 당신을 배신할 수 없고, 당신이 창출해낸 정권은 국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는다. 내부로부터의 분열만 통제할 수 있다면, 당신의 정당은 영원히 대한민국을 지배할 수 있다.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험의 전달  (0) 2013.08.09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0) 2013.07.31
  (0) 2013.07.31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8. 5. 18:13

최소한의 존엄성 지적(知的)2013. 8. 5. 18:13

최소한의 존엄성



  흔히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존엄'이란 뭘까? 무엇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한다. 그러면 인간답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동물과 인간을 구분지을 수 있게 해 주는 것, 즉 '이성'을 가진다는 것이 '인간다움'이라 생각한다. 정리해보면 '인간의 존엄'은 '이성을 가질 수 있는 것', 조금 뭉뚱그려 표현하면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받는 것'쯤 될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왜 지켜져야만 하는 걸까? 인간이 반드시 이성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모든 인간이? 어느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온전한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이성이 키워내는 '생각'의 힘은 무척 강력하고, 그 '생각'에서 나온 현대 문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성으로써 간단히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성을 가진다는 말은, 모두가 이성으로 사고할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유추해 보건대, 인간은 자신이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대비하려는 듯 하다. 지금은 이성을 가지고 자유로이 사고하지만 더 강력한 존재에 속박당해 그것을 잃을 가능성이 상존한다면, 모든 인간에게 그럴(이성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권리는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할까? 이성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떤 비용도 들지 않으므로 이성을 통한 사고의 양에 상한선을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두려고 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인간이 생각하는 양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그 '하한선'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통제한다면?


  인간이 '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 요건이 만족되었을 때다. 예를 들어 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그리고 최소한의 휴식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계속 일만 해야 한다면 인간답게 이성으로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힘들 것이다. 또,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예컨대 감옥에 갇힌) 경우에도 이성적 사고가 힘들어질 것이다. 즉, 우리가 '인권'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권리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을 때에만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신체적 자유, 그리고 여가 시간.


  신체적 자유는 헌법이 보장한다. 그런데 여가 시간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일하지 않는 시간이 곧 여가 시간이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에 노동 시간의 한계를 두고, 최저임금제를 통해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함으로써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있다. 결국 '존엄성'이 보장되는 정도는 노동 시간의 한계를 정하는 '근로기준법'과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는 '최저임금제'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의 존엄성'의 정도를 시간당 최저임금을 주당 노동 한계시간으로 나누는 방법으로 수치화할 수 있겠다. 거기에 물가 변동 수준을 반영한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존엄성의 보장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고, 각 국가별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적 자유의 수준을 반영한다면 국가별로 존엄성을 보장하는 정도를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험의 전달  (0) 2013.08.09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0) 2013.07.31
  (0) 2013.07.31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7. 31. 21:12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지적(知的)2013. 7. 31. 21:12

  왜 사는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인생에서 계획하고 있는 여러가지 단,장기적인 목표들을 나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적어도 나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죽기 싫으니까'. 내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사는 건 아니지만, 이 세상이 그럭저럭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는 된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인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살 시도 역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시도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심한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경우에 인간은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데, 내 생각에 그런 충동은 지속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견딜 수 없게 된 뇌가 다른 신체 부위의 손상을 초래함으로써 주의를 돌려보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나타나는 것 같다. 즉, 충동의 이유는 자해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왜 '적당한 수준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걸까? 아마도 그건 모든 것을 과장해서 생각하기 쉬운 동물 뇌의 특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는 뇌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이성'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멋대로 판단해서 그 생각이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해 후에는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메커니즘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해가 권장되는 건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효과를 믿지 않지만 의사의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으며, 근원적인 스트레스를 제거해야 어느 정도 자해-자살 충동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단지 '죽기 싫어서' 사는 걸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틀린 답은 아니다. 하지만 그 표현을 단순히 '죽음이 싫다'고만 해석하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가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많이 찾는 편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나 푸르른 자연, 태연스럽게 활보하는 귀여운(!) 야생 고양이들, 저녁때면 친구들에게 거는 '수다용' 전화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즐거움들을 누리고 있는데 이 즐거움들을 누리기 위해 산다고 해도 나쁘지 않은 답이 될 것 같다. 내 진로와 전공은 일단 생계, 즉 삶을 위한 것이니 살아가는 이유라고 말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데 살아가다 보면 일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런 현상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슬플 거라고 생각한다. 왠지 '나는 살기 위해 일하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라는 말을 평생 달고 다닌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결론? 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산다. 끝!

 

2013.07.30 19:07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험의 전달  (0) 2013.08.09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0) 2013.07.31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
2013. 7. 31. 21:11

지적(知的)2013. 7. 31. 21:11

나에게 삶이란 이렇게 다가왔다.

 

 

 

1. 생존, 즉 죽지 않은 '상태'. 

 

  완전하지는 않지만, '삶'은 '죽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읽힐 때가 많다. 죽어있는, 또는 애초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물리적 존재와의 차별점으로 삼을 수 있는 특수한 상태.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삶(=아있으)을 느낀다. 예컨대 내 옆에서 아픈 배를 움켜잡고 호시탐탐 화장실 갈 기회만 노리는(즉 변의를 느끼는) 나의 동료는 고통이라는 감각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옆에서 음료를 마시는 또 다른 동료는 '시원함'과 '달짝지근함'을 받아들임으로써 갈증을 해소하며 좀 '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요컨대 살아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느끼는' 것을 통해 받아들이기 쉽다. 결론적으로, '나'는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생각이나 느낌을 통해 내가 '생존'해 있으며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2.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가는 '과정'.

 

  '생명'이라면 어떤 존재든 공간을 점유하며, '시간'이라는 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예컨대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충주라는 도시(=공간)에 몸을 두고(=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1991년 2월 27일, 즉 시간의 틀 안의 정해진 어떤 시점에 태어나서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표기되는 어떤 시점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내'가 존재했던 장소, 존재했던 시간, 더 나아가서는 각 위치에서(또는 각 시점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놓고 내 삶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의 의미로서의 삶을 논하기 쉬운 예로, 이미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사망한 위인들의 전기를 들 수 있다. '몇년도에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서 무엇을 공부했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자라서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였고, 어디서 어떻게 삶을 마감했다.' 이런 식으로 쓴 글 자체가 과정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내 삶을 그런 식으로(=과정으로서의 삶으로) 나타낸다면 '1991.02.27, 대구에서 출생 ... ... 2012.02.13부터 공군에 복무' 이런 형태가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크게 위의 두 가지 의미로 나뉘는 듯 하다. 사실 몇 가지가 더 떠올랐지만, 생각해보면 1번 또는 2번의 범주에 포함되는 경우여서 새로운 항목으로 분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분류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 나에게 삶의 의미는 위의 두 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2013.07.30 11:03

 

주제로서 제목 '나에게 삶이란 이렇게 다가왔다'를 제공해 준 '내 옆에서 아픈 배를 움켜잡고 호시탐탐 화장실 갈 기회만 노리던' 동료 P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지적(知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체험의 전달  (0) 2013.08.09
마인드 컨트롤  (1) 2013.08.07
사회를 지배하는 방법  (1) 2013.08.06
최소한의 존엄성  (0) 2013.08.05
'살아가는 것'이 가지는 의미  (0) 2013.07.31
:
Posted by 페르불가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