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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 30. 15:02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지적(知的)2014. 4. 30. 15:02

죽음, 피할 수 없는 공포

 

  늦은 밤, 혼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 죽음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곤 한다. 막 십대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오던 인류의 고질적인 고민거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는 것이, 죽음 이후에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

 

  일단 죽음에 대한 공포가 찾아오면, 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시도부터 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로서의 생각이 멈춘다고 해도 내가 속해 있는 ‘인간’이라는 종은 존속할 것이며, 나의 후손을 통해서 나의 분신이 이 땅에 계속 살아남아 나를 대신해줄 것이라는 식의 위안. 하지만 아무리 나의 분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내가 소멸하고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다음에는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것은 생물로서의 자연스러운 ‘끝’이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는 못한다. 모두가 예외 없이 맞는 결말이라고 그것이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것은 꼭 ‘우리 모두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될 테니 나의 비극 역시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들린다. 쉬운 예를 들자면 마지막으로 남은 인류의 후손이 모두 한 대의 비행기 안에 타고 있는데, 그것이 추락하고 있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공포가 점점 더 커져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나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현실 도피’이다. 머리맡에 놓여 전기를 공급받고 있던 나의 SHW-E250L.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와이파이 신호를 통해 ‘죽음’이라는 주제를 뇌리에서 몰아내고 그보다 좀 더 ‘현재에 가까운’ 현실적인 삶의 주제들을 생각하려는 것이다. 즉 ‘현실로 돌아감’으로써 ‘현실 도피’를 시도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렇게 ‘철저히 세속적인’ 생각들을 불러옴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정신의 파괴를 막을 수 있지만, 이 방법은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애초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 때마다 바로 세속적인 문제에 집중하면 공포를 쉽게 몰아낼 수 있음에도 그 주제에 맞서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보는 것은, 뭔가 더욱 근본적이면서 확실한 해결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의 대상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항상 다른 영역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 벗어나기만 한다면, 결국 해당 주제는 극복되지 못한 채 언제든지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약점’으로 남게 된다. 그걸 알고 있지만, ‘죽음’은 2014년의 봄을 살아가고 있는 20대 초중반의 나로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Terra Incognita'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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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페르불가투스